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

 

주화로 물건을 사고팔 수 있다면 물건에 각각 값을 매기기만 하면 된다. 물건을 거래하려는 사람들이 자신의 욕구를 다른 이의 욕망과 일치시키기 위해 더 이상 애쓰지 않아도 된다.

 

18세기 프랑스와 스페인 정부가 발행한 채권 금리가 높았던 이유는 이것이다. 신용등급이 부여되지는 않았지만, 부도가 빈번하게 발생했다는 점에서 신용도가 낮은 회사채와 다를 게 없었다. 국가나 개인의 신용도가 낮을 때, 금리는 높아진다. 그리고 금리가 높은 나라(또는 기업이나 개인)일수록 불확실성이 높으며 자본시장이 발달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왜 1930년대 미 연준은 폴 볼커와 같이 과단성 있는 정책을 취하지 않았을까? 여러 차례 언급했듯, 금본위제 때문이었다. 불황이 출현해 중앙은행이 돈을 풀고 금리를 내리면, 더 높은 금리를 찾아 자금이 해외로 유출된다. 금이 해외로 유출되면 시중에 통화량이 줄고, 그 결과 중앙은행의 금리 인하는 무력화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러 나라가 한번에 같이 금리를 내리는 등 국제적인 공조가 필요했지만, 당시 세계 주요 중앙은행의 리더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사망하는 '불운'이 닥치면서 이를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다.

 

닉슨 쇼크 이후의 시장을 다룬 5부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중앙은행에 맞서지 말라'는 것이다. 금본위제의 족쇄에서 풀려난 중앙은행은 예전보다 훨씬 더 과감하게 정책을 취할 여력이 생겼다. 1980년처럼 금리를 20%까지 인상할 수도 있고, 1983년처럼 3%대까지 금리를 인하할 수도 있다. 

1929년 대공황 당시에는 중앙은행들이 '금본위제'의 사슬에 묶여 있었을뿐만 아니라, '청산주의'에 빠져 있었기에 즉각적인 대응이 어려웠다. 반면 1971년 이후 중앙은행이 자기 뜻대로 유연하게 금리를 인상하거나 인하할 수 있게 되면서 경기순환의 주기도 길어졌고, 자산시장의 진폭도 예전보다 줄어들었다.

 

그리고 1800년이 지나면서부터는 '인구와 소득의 동반 상승' 현상이 장기화되기에 이른다. 왜 잉글랜드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어떤 이는 잉글랜드 사람들이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영국이 석탄 위에 자리 잡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산업혁명을 일으키기에 유리한' 조건을 가진 데다, 대서양이 태평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아 아메리카 신대륙으로의 항해와 교역이 유리했다는 것이다. 반면 어떤 이들은 '제도'에 주목한다. 명예혁명 이후 금리가 낮아진 것처럼, 왕이 자의적으로 세금을 부과하거나 다른 이의 재산을 빼앗는 일이 금지된 세상일수록 혁신을 추구할 유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필자의 입장에서 마지막 가설은 참 매력적이다. 재산권이 보호되는 좋은 제도를 가진 나라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산업화를 추진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는 주장은 '도덕적'으로도 참 기분 좋은 설명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 당시 달러가 강세를 보인 건 볼커 연준 의장의 강력한 금리 인상 때문이었다. 다른 나라에 비해 달러 이자율이 훨씬 더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인플레가 완전히 퇴치될 때까지는 고금리 정책을 유지하겠다는 연준의 태도 덕분에 전 세계 투자자들은 달러에 대해 다시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달러 강세가 오랫동안 지속됨에 따라,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 문제가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중략) 1. 미국의 무역수지 개선을 위해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의 평가절상을 유도한다. 2. 이것이 순조롭지 못할 때에는 정부의 협조 개입을 통해 목적을 달성한다. (1985.09 플라자 합의)

달러에 대한 엔화 환율이 절반수준으로 떨어졌으니, 수입물가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수입 물가가 떨어지니, 일본에서 만들어진 각종 제품의 가격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수출 기업들은 이전에 비해 훨씬 어려운 여건에서 경쟁할 수밖에 없었다. (중략) 이른바 '엔고 불황'에 대응해 일본 중앙은행은 금리 인하로 대응했다. 플라자 합의 직전 5%였던 재할인율을 1987년 초 2.5%까지 떨어지자, 일본 경제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중략) 엔고로 수출경쟁력이 약화되었기에, 일본 기업들은 수출보다는 국내 소비를 겨냥한 투자, 즉 부동산 및 리조트 등 위락시설 투자에 집중했다. 

그러나 블랙 먼데이는 일본에 매우 난처한 문제를 일으켰다. 미국 정책당국자가 독일이나 일본 등 주요 선진국 중앙은행에게 '심각한 금융위기로 발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세계 주요국 중앙은행이 함께 금융완화 정책을 시행하자'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블랙 먼데이 직전, 일본 중앙은행은 금리 인상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내수 경기가 강하게 살아나고 주식시장이 급등하는 등 이른바 '엔고 불황'에 대한 우려가 진정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1987년 상반기에 금리를 인상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를 미적거리다 미국 블랙 먼데이로 인한 '국제 공조'에 동참하느라 1989년까지 금리 인상을 단행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주식 버블이 출현했다. (중략) 1980년대 말, 일본에서 주식가격 폭등보다 더 문제가 된 것은 부동산이었다. 주식시장 호황으로 기업들의 증자 및 신규 상장이 쉬워짐에 따라 은행의 기업 대출이 줄어들었고, 은행이 남아도는 돈을 부동산 담보 대출로 운용하기 시작하면서 안 그래도 비쌌던 일본 주택 가격이 급등했다. 

 

예를 들어 지나친 저금리로 인플레가 발생하면 긴축으로 전환하여 해결할 수 있지만, 경기 부양이 너무 늦거나 규모가 약해 디플레이션에 진입하게 되면 경제를 다시 정상 수준으로 되돌릴 방법이 마땅찮다. 따라서 자산가격 버블이 붕괴될 때는 일단 시장 참가자들의 미래 경제에 대한 예상을 바꿔놓을 정도의 공격적인 경기부양이 필요하다. 

 

이후 일본은 일시적 유가상승에 따른 물가상승을 보고 인플레 압력이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것으로 착각하고, 경기부양을 하지 못했다. 또한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비세를 기존 3%에서 5%로 인상하는 등 일본경제는 돌이키기 어려운 장기 불황의 악순환에 빠져들었다고 볼 수 있다.

 

1945년 이후 독립한 국가들 중 1인당 국미소득 '1만4천 달러의 장벽'을 돌파한 나라는 우리나라와 타이완 두 나라에 불과하다.

 

참고로 1950년 3월 이승만 정부가 통과시킨 토지개혁법은 '소유주가 직접 경작하지 않는 모든 토지와 3만 제곱미터가 넘는 모든 토지'를 재분배 대상으로 규정했다. 이 법안에 따라 정부로부터 토지를 구입한 농민이 지불해야 할 금액은 해당 토지에서 산출된 연간 생산량의 150%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정부가 지주들로부터 토지를 인수하면서 지급한 대금의 상당 부분이 미국의 원조로 충당되었다. (중략) 토지개혁이 가져온 첫번째 변화는 바로 '경제성장'이었다. (중략) 토지개혁 이전에 우리나라는 인구의 90%가 농업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농업국가'였음에도 식량 자급조차 이뤄지지 못했다. (중략) 그러다 토지개혁이 이뤄지며 농업생산성이 극적으로 향상된 것이다. (중략) 이후 선순환이 이어졌다. 농업 생산성이 높아짐에 따라, 농촌의 여유 노동력이 도시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고, 기업들은 이들을 고용해 내수시장에 물건을 팔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더 만족되어야 했다. 그것은 제조업의 적극적인 육성이었다. 

 

1960년대 우리나라, 사채금리가 높을 때는 60%, 낮아도 40% 수준이었다. 농촌에서 잉여생산물이 생겼다고 해서, 이게 다 저축으로 연결되지는 않았기에 당시 우리나라 경제는 항상 자금 부족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에서 은행이 수출 기업들에게 제공하는 대출금리를 1966년부터 1972년까지 6%로, 이후 인상되었어도 1976년까지 8% 수준을 유지한 것이다. (중략) 이는 수출 실적을 내기만 하면, 시장금리보다 50%포인트 이상 낮은 저금리로 자금을 장기간 대출해준다는 약속이나 다름없었다. (중략) 공장 건설 이후 수출 실적이 나오지 않고 원하는 기준에 미달한다고 판단될 때, 성공적인 기업에 강제로 합병시키거나 국영 금융시스템을 통해 자금을 회수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파산이라는 궁극적인 제재를 가했기 때문이다. 

 

1997년 외환위기가 왜 발생했을까? 필자는 고정환율제도를 유지하면서 금융자유화를 추진한 우리 정부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본다. 1990년대 우리나라처럼 외국과 활발하게 무역을 하고 자본이 자유롭게 오가는데도 노동력 이동에 제약을 가하는 작은 나라를 생각해보자. 어느 날 이 나라의 주력 수출제품 가격이 갑자기 폭락해 수출이 급격히 줄어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제일 먼저 고용과 국내총생산이 감소할 것이며, 수출 감소 영향으로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가 발생하는 것은 물론 충격에 대응해 중앙은행이 금리를 인하하며 이 나라에 투자했던 돈들이 해외로 대거 유출될 것이다.

경상수지 및 자본수지가 함께 악화되니 외환 공급이 크게 줄어들 것이며, 달러에 대한 자국 통화의 환율은 상승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 나라가 고정환율제도를 채택하고 있다면, 이 나라의 통화 당국은 보유하고 있는 외환을 시장에 내다 팔고 자국의 통화를 거두어 들여야 한다. 그 결과 통화공급이 감소하면 총수요가 더 감소하므로 생산량이 줄어들고 실업이 늘어난다. 다행히 '불황으로' 경상수지 적자가 신속하게 해결되면 상관없지만, 경상수지 개선속도가 더딜 때에는 이 나라가 가진 외환보유고가 소진될 위험에 처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등 극단적인 위기를 겪게 될 것이다.